음악과 같이 한목사님 육성도 있는 샘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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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육성도 들으시고 말씀도 듣고 은혜의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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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바야(Kumbaya)라는 말은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들이 그들의 기도를
'주여! 내 곁에 임하소서(Come by here, my Lord!) 노래로 만들어 부른것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그들의 고단한 삶 가운데서 자연스레 기도와 찬양의
고백이 표출된 것입니다.
언제..어디서부터 바뀌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초기 선교사들이 서아프리카(앙골라지역)로 건너가 원주민들을 선교할 무렵
누군가 가르친 Come by here라는 성가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흑인들에게'쿰바야'로 들렸고 아프리카식으로“쿰바야(kum ba yah)"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를 어색하게 생각지 않아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누구나 쿰바이야 라는 말로 찬송하게 되었답니다.
Kumbaya는 영어의 "Come By Here (여기 임하소서)"
Kumbaya my lord, Kumbaya
Kumbaya my lord, Kumbaya
Kumbaya my lord, Kumbaya
Oh lord, Kumbayah
여기 오소서 내 주여
Someone's singing lord, Kumbaya
Someone's singing lord, Kumbaya
Someone's singing lord, Kumbaya
Oh lord, Kumbaya
찬양하는 자에게 오소서
Someone's praying lord, Kumbaya
Someone's praying lord, Kumbaya
Someone's praying lord, Kumbaya
Oh lord, Kumbaya
기도하는 자에게 오소서
Kumbaya my lord, Kumbaya
Kumbaya my lord, Kumbaya
Kumbaya my lord, Kumbaya
Oh lord, Kumbaya
Someone's laughing lord, Kumbaya
기뻐하는 자에게 오소서
Someone's crying lord, Kumbaya
우는 자에게 오소서
Someone's shouting lord, Kumbaya
부르는 자에게 오소서
Someone's sleeping lord, Kumbaya
잠든자 자에게 오소서
2011년 KBS 성탄특집 다큐멘터리 2011년 12월 25일 성탄절 밤 10:30 KBS1
신행일치의 삶을 실천한 20세기 한국교회의 대표 목회자
기획 의도
너무 많은 걸 이루어 놓고도, 너무 많을 것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누구보다 가난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이자 20세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목회자라는 평을 받는 故한경직 목사.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교회를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또한 서울여대, 숭의여대, 숭실대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고아와 노인,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 모자원 고아원등 수많은 사회시설을 설립하고, 사랑의 쌀보내기 운동, 선명회(월드비전)등 사회봉사 운동의 씨앗을 뿌리며 한평생 교육자로서 사회봉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2000년 4월 남한산성 자락 6평 남짓한 조그만 거처에서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평생 통장 한번 만들지 않고 소유하려하지 않으려 하였기에, 그가 남긴 것은 40여년 동안 쓰던 일인용 유아용침대와 안경이 전부였다.
그는 진실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삶과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메시지가 되고 있다.
믿는 만큼 실천하는 삶을 살고, 평생을 베풀기만 했던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죄인이라 말하던 그의 삶을 오늘 다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을 잃고 오직 자신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며, 실천은 없으되 남을 현혹하는 말만 난무하는 우리사회가 기억하고 닮고 싶은 미래가 그의 삶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제작 방향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빈손(가제)’ 은
종교인으로서 한경직 목사의 삶을 다루되, 종교적 윤리와 사상을 강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 한경직이다.
- 민족을 사랑했던 인간 한경직 -
2000년 4월 19일 한경직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거 하던 방,
침대에 누우면 바로 보이는 곳엔 한경직 목사가 손수 붙여 두었던
태극기와 애국가 문구가 있다.
망해가던 조선의 백성으로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에서 민족과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이 갈길을 고민하고, 해방이후 6.25의 격변을 격으며
우리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행동에 옮겼던 한경직목사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 사회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 영원불변한 시스템의 창시자 -
한경직 목사는 20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인물보다도 많은 학교와 사회단체를 만들었고, 기존에 없던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98세의 일기로 그가 떠난지 11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만들었던 대부분의 단체와 사회운동은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배고픈자에게 빵을 주고 떠나는 것 보다는 빵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고기를 주고 떠나는 것 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현명함을 알았던 그는 새로운 사회사업을 할 때 항상 그것이 영원히 처음의 목적 그대로 유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이는 진정한 사회봉사, 사회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기획 되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 크다.
- 영원한 백만장자 한경직 -
한경직 목사는 소유하려 하지 않았기에, 평생 통장이 한번도 없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그의 가족에겐 너무 가혹한 가장이었다. 마지막 유언에서 가족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을 위한 기도밖에 없다.”라고 이야기 했을 만큼 그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런 그가 딱한번 엄청난 부자가 된 적이 있다. 바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을 때 1백 2만불 (우리돈 11억 정도)의 거금을 상금으로 함께 받은 것이다.
수상을 하고 상금 수여가 끝난 1분후, 그는 그 상금을 바로 북한 선교를 위해 헌금으로 기탁했다. 1분간의 백만장자. 그게 그가 누려본 최고의 부자 시절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누가 필요한데 쓰라고 돈봉투를 주면 열어보지 않고 다른 필요한 곳에 주었고, 한겨울 잠바라도 선물받으면 교회앞 노숙자에게 달려갔다. 항상 빈손이었지만 백만장자보다 더 많이 베풀고 살았기에 그는 영원한 백만장자인지도 모른다.
구성 요소
프롤로그 / 실패한 목자!
" 나는 아무것도 없다. 땅 한평, 집 한 칸이 없다.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이 있다면 공적인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남기는 것은 없지만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 하고 있다 “
- 고 한경직 목사님이 육성 테이프를 통해 가족에게 남긴 유언 중 -
2000년 4월 남한산성 기슭의 작은 처소에서 98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한 한경직 목사. 그가 남긴 것은 40년을 사용하던 유아용 일인용 침대, 안경, 헤진 양복 몇 벌과, 낡은 성경책이 전부였다.
이런 한경직 목사를 ‘실패한 목회자, 바보 목사님’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땅의 어느 성공한 목회자가 산꼭대기의 허름한 집에 기거하며 병약한 노년의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말이다. 그래서 그는 실패한 목자이다. 그리고 그 실패로써 참 성공의 열매를 거둔 종이었다. 그는 직업 목회자가 아니었다. 대신에 ‘보여주는 설교의 달인이었다.
적빈했던 삶 자체가 눈에 보이는 설교였고, 순수한 일상이 곧 복음의 걸음걸음이었으며, 진솔한 참회는 회개와 용서의 모범이었다.
◈ 애국과 민족애 나라사랑의 길을 먼저 배우다.
그는 1902년 12월29일(음력)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광학교를 졸업한 후 한경직 목사는 평북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애국자가 세운 학교에 가야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오산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였고 당시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산학교는 청년 한경직에게 식민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민족이 힘없이 외세에 억눌려 있었던 것은 과학적 지식이 뒤떨어진 때문이라고 판단한 그는 평양의 숭실대학에서 이과를 공부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길로 성직을 결심하게 된다. "조국을 위하여 울라,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라, 조국을 위하여 네가 할 일을 하라" 성직자가 된 한경직 목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역설했다. 애국 애족의 신앙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일생 동안 십자가 옆에는 항상 태극기가 나란히 있었다.
지금도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침대 맞은편엔 태극기와 애국가문구가 적힌
낡은 종이 한장이 붙어있다.
◈ 죽음앞에서 결심한 봉사의 길
민족에 도움이 되고자 오른 미국 유학길. 의욕적으로 선진지식을 쌓던 어느 날, 그는 폐결핵으로 모든 것을 중단하게 된다.
당시에는 쉽사리 고칠 수 없던 폐병 3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그는 요양하면서 기도했다. “저를 3년만 살려 주십시오. 한국에 돌아가서 제가 믿는 바를 소신껏 외치다가 죽고 싶습니다”라는 봉사의 기회를 간구하는 애절한 기도였다. 1932년 귀국하면서 그의 ‘덤으로 사는 인생’은 세계적 목자로 가는 고난과 역경의 디딤돌로 이어졌다.
◈ 교회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경직 목사의 첫 목회지는 신의주 제2교회였다.
이 교회에서 그는 자신의 교회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그것은 자신의 성직자로서 삶의 방향과도 관련된 고민이었다. 그리고 고민의 결론을 세가지로 내렸다.
첫째, 나라가 망했으니 나라를 되찾는 것이 한국청년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둘째,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과학을 배우게 해야 하며
셋째, 애국심과 과학적 지식만으로는 안되고 근본적으로 먼저 사람이 바로 되어야 하기에 예수를 믿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후 전도사업, 교육사업, 봉사사업 등 세 가지 사업을 목표로 정한 그는 교회의 사명을 충실히 이루어 갔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으며 그의 목회 철학은 열매를 거둬 갔다. 특히 이 교회에서 설립한 고아와 노약자를 위한 보린원은 교회가 사회에 해야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역사적 표본이 되었다.
◈ 영원한 사회기여 시스템을 고민하다.
한경직 목사의 사회복지 활동은 특이했다. 사회가 그때 그때 필요로 하는 목적으로 그에 맞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복지시설을 만들땐 항상 그 시스템이 영원히 유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많아지자 우리나라 최초의 모자 시설인 ‘다비다 모자원’을 부산에 설립했고, 전쟁고아가 많아지자 미국인 선교사 밥 피어스와 함께 선명회(지금의 월드 비전)를 만들었다. 52년에는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이 많아지자 ‘영락경로원’을 서울 돈암동에 열었다.
시설을 만들 때는 단순히 건물을 지어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을 뽑았다. 그리고 그사람들을 통해 후원자를 모집하고 그 시설이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런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영락 사회 복지재단이다. 재단내의 시설수만 13개, 평균 이용자 670여명인 영락사회복지재단은 교회가 만든 복지재단으로 비교 대상이 없는 최대 규모로 지금도 활발한 활동 중이다.
◈ 세계가 인정한 한경직, 종교계의 노벨상 템플턴 상을 수상하다.
한경직 목사는 지난 1992년 종교 분야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템플턴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했다. 템플턴상은 미국의 사업가 존 템플턴이 노벨상에 종교 부문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72년 자신의 재산을 헌납해 템플턴 재단을 설립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한경직 목사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의 설립자이며,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세계의 이목을 한국의 기독교 성장에로 집중하게 한 지도자이다. 한목사는 아마도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 교회를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선교를 통해 수많은 기독교인을 양육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교육기관과 사회봉사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또 사회봉사자로서 사회복지에 기여하였으며, 국가의 위기시에는 우리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현실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수상 후 상금 102만달러를 받자마자 북한선교 헌금으로 전하면서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 봤다”며 웃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다 비우고도 남겨진 목사 한경직의 위대한 유산!
세계최대의 기독교 NGO 월드비전
월드비전은 한국전쟁 중 미국인 밥 피얼스 목사와 한경직 목사가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에 대한 구호를 위해 시작되었다.
월드비전은 전세계 100여개국에서 활동하는 세계최대의 기독교 NGO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해 14000여명의 직원들이 약 10억달러의 예산으로 170만 결연 아동과 그의 가족, 지역사회를 돌보고 있다. 또한 전세계 백만명 이상의 후원자가 있으며 정부, 기업, 교회, 지역사회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그가 뿌린 사랑의 씨앗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로 향하고 있다.
◈ 사랑을 전하는 새로운 방법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지금은 각종 사회단체나 기관에서 흔히하는 사랑의 쌀 모으기 운동.
그러나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한경직 목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90년 군사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국내분배, 해외분배, 북한 분배의 3분배 원칙을 지키며 21년동안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1990년 군사정부시절, 북한에 쌀을 보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90년 북한의 식량사정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경직 목사 도로 우리나라 최초로 1990년 7월 쌀 1만 가마를 북한 동포에게 전달함으로써 첫 남북 민간 교류의 문을 열었다. 한경직목사의 노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북에 두고 온 교인과 교회였다. 그러기에 그는 템플턴상 상금 102만불을 모두 북한선교를 위해 헌금하고 끊임없이 북한선교의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백두산의 튼튼한 소나무로 북녘 고향땅에 교회 지어 예배드리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1997년 96회 생일을 맞은 한목사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중 )
한목상의 북한사랑에서 시작된 이운동은 국내에서는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담아 소년 소녀 가장, 결식 아동, 무의탁 노인,장애인, 실직 가정, 사회 복지 시설 등 소외 이웃들에게 사랑의 쌀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해외는 필리핀을 시작으로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인도, 몽골, 베트남, 러시아, 르완다, 미국, 소말리아, 수단, 에치오피아, 일본, 타지키스탄 등에 식량을 나누어 주는 등 이 운동은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무보수 도움으로 진행되고 있다.
◈ 에필로그 / 세상이 그에게 준 상은 화려했으나 삶은 초라했고,
삶은 초라했으나 영은 누구보다 부자였던 사람
한경직목사는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한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땅 한 평, 집 한 채 사본 적이 없고, 저금통장 하나 없었다. 어려운 시절에도 먹을 것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경직목사는 수많은 해외여행에서 선물로 받은 것 중에 기본적인 약품 몇 개 외에는 어떤 외제품도 반입하지 않아 세관에서도 그의 수화물조사를 항상 면제할 정도였으며, 영락교회에서 사택을 지어주었으나, 너무 크고 사치하다 하여 사양하고 남한산성의 아주 좁은 공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한경직 목사님이 템플턴상을 받을 때 일이었어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시는 한 목사님을 간신히 설득하여 수상식에 가게 됐지요. 출국날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목사님이 나오시지 않는 거예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와이셔츠 차림으로 쩔쩔매고 계셨어요. 열린 옷장을 보니 마땅한 웃도리가 눈에 띄지 않았어요. 결국 백화점에 들러 급하게 한 벌 사서 공항으로 달려갔지요.”(나옥주 보성학원 이사)
“한번은 오리털 점퍼를 선물로 해 드렸어요. 그런데 얼마 후 백병원 앞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이 그 옷을 입고 있더라고요.”(조정희 영락교회 은퇴권사)
“누가 봉투를 놓고 가면 열어보지도 않고 모았다가 필요한 곳에 보내셨지요.”(강병훈 이화학원 이사장)
“한경직 목사님 10주기 추모 유품전을 준비하면서 영락교회 등으로부터 인계된 목사님의 유품을 보고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내세울 만한 유품조차 없어 어떻게 전시회를 꾸밀까 걱정했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통장 하나 소유하지 않았던 한 목사님의 진면목인 것 같네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경직 목사 소천 10주기 추모 유품전’을 앞두고 최병현 박물관장.
한경직 목사 약력
◈ 출 생 .
1902. 12. 29(음)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출생
(부친 한도풍(韓道豊)씨, 모친 청주 이(李)씨 사이의 장남)
◈ 학 력
1916 평남 평원군 공덕면 진광학교 졸업
1919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졸업
1925 평양 숭실대학교 졸업(이과)
1926 미국 엠포리아 대학 졸업
1929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졸업
1948 미국 엠포리아 대학 명예 신학박사 학위
1956 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학위
1977 숭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학위
◈ 경 력
1931 평양 숭인 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
1933 신의주 제2교회 목사(10년 시무)
1939 신의주 보린원(고아원) 설립
1945 서울 영락교회 창립(27년 시무)
1947 영락 보린원 설립
1947 대광학원 이사장 취임
1950 보성학원 이사장 취임
1950 CCF(기독교 아동복지 재단) 이사장
1951 부산 다비다모자원 설립
1952 영락경로원 설립
1952 영락 중, 고등학교 설립
1953 홀트 양자회 이사장
1953 선명회 이사장(36년간)
1954 영락 모자원 설립
1954 숭실대학 학장 역임
1955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40회 총회장 역임
1956 한국 기독교 연합회 회장
1962 서울여자대학 이사장 역임
1967 숭실대학 이사장 역임
1969 영락여자신학교 설립
1971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대학 이사장 역임
1973 영락교회 원로목사 추대
1973 군복음화 후원회 회장
1973 한국교회 진흥원 원장
1973 아세아 연합 신학원 이사장
1976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총재
1976 한국 외항선교회 명예회장
1983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
1984 재단법인 남강 문화재단 이사장
1985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재단법인 이사장
1988 군 복음화 후원회 명예회장
1989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대표
1989 선명회 명예 이사장
1990 한국 총연합회 명예회장
1990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1990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명예회장
1995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 '영락 애니아의 집' 설립
◈ 수 훈 사 항
1970 국민훈장무궁화장수상
1992 템플턴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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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3,4 나 다 같다고 보면 됩니다.
이건 64비트라 이제 환경에 맞게 프로그래밍 된 느낌입니다.
준전문가용 HD라는거...
요즘 방송국 프로그램을 보면 성격상 이동성이 좋은 카메라면서 화질이 좋은 장비인
소니의 XDCAM HD 시스템으로 촬영하여 방송된다고 한다.
소니에서 처음으로 HDR-FX1을 2005년 봄에 출시하여 가볍고 싸고 화질이 좋다는 이유로 급속히 일반 유저에까지 퍼져 나갔고,
그후 프로용에 가깝게 만든 Z1이 출시되었는데 말이 프로이지 사실 가격대는 일반용으로 충분한 낮은 가격대였다.
그 후 파나소닉, 캐넌 등 "가정용인지 프로용인지 구분이 애매한 카메라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FX1은 산악지방 다큐를 찍을 때 무거운 ENG 카메라 대신 가볍고 쉽게 들고 다니면서 HD급 고화질의 영상을 촬영할 수도 있고,
또한 KBS의 "걸어서 세계로" 시리즈가 FX1를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최근 소니는 FX1의 후속기종으로 FX7을 새로 발표했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등 대부분 디지털 영화들이 촬영된 유명한 카메라가 있다.
소니의 F900 이다. (정식 모델명은 Sony CineAlta HDW-F900R)
24p 촬영이 가능하고 1920x1080 해상도 촬영이 가능하여 기존의 35mm 카메라를 대체하여 촬영되었다.
그런데 가격대를 보면 본체만 8만불이고, 보조장비까지 갖추면 10만불이 넘어간다.1억원 억! 악.. 꽈당~
F900, F950 등과 같은 기존 제품을 CineAlta HDCAM이라고 부르고,(CineAlta 로고 - 최고,최상의)
이와 별도로 PDW-F355, PDW-F335, PMW-EX1 과 같은 제품을 CineAlta XDCAM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XDCAM 시대의 도래
2005년에 FX1이 프로용 장비에서부터 작년 말에 나온 2008년에 EX1이 방송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니의 PMW-EX1은 성능은 CineAlta 로 분류될 수준이며 기존 FX1, Z1 급 보다는 일단 화질에서 훨씬 앞선다.
그리고 가격대가 700만원대이다.(가격은 시간이 지나면 내리겠지...^^)
일반 제품으로는 비싼 금액이지만, F900처럼 1억원 전후의 라면 이 정도는 파격적인 금액이다.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MiniDV 기록 방식의 캠코더들은 해상도가 1440x1080이다.
가정용 캠코더 중 HD급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1920x1080의 16:9 방식이 아닌 1440x1080의 4:3 포맷이다.
이것을 1920x1080으로 잡아 늘려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XDCAM은 그럴 필요가 없다.
1920x1080 리얼 HD 해상도이며, 24p 필름 프레임을 지원한다.
그러나 XDCAM의 진수는 저장 미디어로 SxS(에스바이에스) 플래쉬 램을 사용한다는 데에 있다.
Express Card는 PCMCIA 와 비슷한 크기로, SxS 플래쉬 램을 노트북의 Express Card Slot에 넣으면 그대로 데이타를 옮길 수 있다.
SxS 메모리에 저장되므로 영상을 그 자리에서 즉시 확인하고 또 그 자리에서 즉시 편집, 삭제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테이프 방식이라면 앞으로 돌리고, 뒤로 돌리고 성가시죠...테이프로 캡쳐의 번거로움도 없고..
그냥 곧바로 편집 프로그램에서 불러내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내 주변의 모습을 방송급(HD급)으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앞으로는 HD 컨텐츠로 선교영상을 만든다는 것이 설레인다.